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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먹구름

192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파시즘과 반유대주의 기류는 1930년대로 접어들며 폭풍처럼 거세졌고, 그 흐름을 제대로 읽은 유럽의 유대인들은 미국 등지로 피난을 택했습니다. 폰 노이만은 이미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기 전부터 미국 프린스턴으로 이주한 상태였고, 괴델 역시 유대인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1938년에 뒤따라 미국으로 건너옵니다. 힐베르트의 제자와 동료 가운데 유대인 대부분은 1933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추방당했으며 이후 미국, 캐나다, 취리히 등지로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힐베르트는 독일 괴팅겐에 남았습니다. 1934년 그는 한 연회 자리에서 나치 교육부 장관16과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그는 힐베르트에게 유대인의 영향이 사라진 현재 괴팅겐 수학계는 어떤지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힐베르트는 “괴팅겐의 수학이요? 그런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925년부터 힐베르트는 당시에는 치료가 어려웠던 비타민 B12 결핍으로 악성 빈혈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병은 심한 피로감을 유발하며 전신을 쇠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194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지인과 동료 가운데 많은 이가 유대인이거나 유대인과 결혼했거나 유대인들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힐베르트의 사망 소식은 몇 달이 지나도록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