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북(TheBook)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부터 쉬지 않고 떠드는 열정돌이의 왼손에 들린 종이를 슬쩍 보았다. 하단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일렬로 적힌 걸로 보아, 아마도 상인들에게서 서명을 받는 중인 모양이다. 종이 상단에는 큼지막하게 ‘아라비아 숫자 사용 동의서’라 쓰여 있었다.

제목 아래에 쓰인 본문에도 눈길이 갔다. 까치발을 해가며 어깨너머로 글을 읽어 보니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기존의 로마 숫자 표기는 착오와 혼동이 많을 뿐 아니라 불편하니, 피사1에서 상거래를 할 때에 쓰는 수 표기법을 아라비아 방식으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방금 펜으로 쓴 로마 숫자 XCIX2와 아라비아 숫자 99도 보였다.

본문을 읽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주변이 묘하게 조용해진 것 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다들 별안간 끼어든 웬 거지를 불쾌한 시선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물론 그 거지란 나를 말한다.

“구구절절 다 맞는 내용이구먼. 쳇.”

나는 짧게 툭 뱉고서 뒤로 돌아 그 자리를 피했다.

 

 


  1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 지방의 해안 도시 피사를 중심으로 번영하였던 도시 공화국으로, 11~12세기에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해 동방과의 무역을 주도하며 번영하였다.

  2 로마 숫자로 99를 표기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100을 의미하는 C를 적고 그 왼편에 10을 의미하는 X를 적어서 100보다 10이 모자란 90(XC)을 적는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 10을 의미하는 X와 그 바로 왼편에 1을 의미하는 I를 적어서 10에서 1이 모자란 9(IX)를 적는다. 즉, XC는 90을, IX는 9를 의미하여 XCIX는 99와 같다. 마찬가지로 5를 의미하는 로마 숫자는 V, 1000을 의미하는 로마 숫자는 M으로, 만약 1194를 로마 수 체계로 표기하면 MCXCIV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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