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북(TheBook)

‘양의 탈을 쓴 늑대’ 전략에 따라 탄생한 제품이 ‘AVS(Advanced Video System)’였다. 이 기기는 본질적으로 패미컴과 거의 같았지만, 외관만큼은 일본판과 확연히 달랐다. 컴퓨터 키보드, 음악용 키보드, 카세트 리코더가 내장된 AVS는 은은한 회색톤의 날렵한 외형을 갖추어 톡톡 튀는 빨강과 흰색 조합의 패미컴과는 아주 대조되었다. 콘솔 같지 않은 콘솔이었던 닌텐도의 AVS1984년 동계 소비자 가전 전시회(Winter Consumer Electronics Show, WCES)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당시 AVS 광고지에는 The evolution of a species is now complete.(더 이상 종의 진화는 없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곧 출시할 신제품을 보여주기 위해 전시회에 참가한 수많은 회사 중에서 제품을 팔지 않는 회사는 닌텐도가 유일했다. 아라카와의 목표는 오로지 시장 반응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현실은 우려했던 것만큼 암울했다. 비웃음, 한숨, 눈물뿐이었다. 마치 바위에 꽂힌 전설의 검이라도 보는 듯 날카로운 푸른 눈으로 AVS를 응시하는 구릿빛 피부의 한 남성이 나타나기 전까지 닌텐도와 무언가 해보려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남자는 아서왕도 울고 갈 만큼 절제되고 확신 있는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샘 보로프스키(Sam Borofsky)였다.

보로프스키는 맨해튼의 영업 및 마케팅 대행업체 샘 보로프스키 어소시에이츠(Sam Borofsky Associates)를 운영했다. 공급업체와 소매업체를 중개하는 게 이런 업체의 역할이며, 그 바탕에는 자기들이 만들어내는 기회를 생각하면 중개업체가 받는 수수료는 정당하다는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샘 보로프스키 어소시에이츠는 소비자 가전업계에서 잘나가는 편이었다. 이들이 비디오게임 업계와 거래를 시작한 70년대 후반 무렵에는 그런 일을 하는 회사가 별로 없었고 한창 호황일 때는 아타리 판매량의 30% 이상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에 딱 맞는 업체였다. 보로프스키 쪽도 강하게 끌리긴 마찬가지였다. 아타리가 무너지고나서 미래를 책임질 제품을 찾아 전국을 샅샅이 뒤지던 그는 닌텐도가 제시한 미래를 보고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마침내 만났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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